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Little things are not so little

바이오 용사

숲은 이제,

이렇게 변했다. 푸른 손바닥으로 겹겹이 가린 검은 어둠.

어떤 나무들은, 그 속으로 간신히 떨어진 빛을 받아

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선명하게 빛난다.

후끈한 마을을 지나 숲으로 가는 길, 서늘한 공기가 팔다리를 감싼다.

숲에선, 늘 낮은 감탄사로 나무들에게 인사하는 우리.

저녁 산책길, 길마다 이런 열매가 떨어져 있다. 앵두일까? 

앵두는 아니야. 그런데 볼 때마다 먹고싶다. :-|

준 백야가 한창인 동네는 아홉시를 훌쩍 넘겨도 이렇게 바닐라빛.

온통 고요해서 세상에 우리만 남은 것 같은 느낌. 유령도시같은 요즘의 늦은 저녁 산책이 즐겁다.

집들을 벗어나 숲 근처의 길에 이르면 심심한듯 무심한듯 불쑥 나타난 고양이들이 찬수에게 다가온다.

고양이들은 널 좋아해. 늘 찬수에게 성큼성큼 걸어와 거침없이 인사한다.

이 길 위의 모든 빛이 좋다.

나무의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저 사이로 아직 불 꺼지지 않은 시내 건물들.

잠든 듯 고요해진 도시의 실루엣이 좋다.

조용한 실루엣 앞에서 늘 발걸음을 멈춘다.

휴일 아침의 산책. 청량한 새벽 첫 공기.

뒷문을 열고 집을 나서면 내가 좋아하는 분홍 장미와 고사리와 라벤더의 길이 이어진다. 암사동 살던 시절이 생각나서 좋은 길.

언젠가는 이 길도 그리운 길이 되겠지. 이쁜 꽃과 나무들의 길.

나무가 동행해주는 드라이브 길.

모션 블러 처리되는 나무들은 물 속을 달리는 기분이 들게 한다.

라인강

어느 날

갑자기 소나기

또 어느 날은 갑자기 오월의 한기. :-|

그리고 마침내 삼십도가 넘었던 날, 냉동딸기-바나나-카카오닙스를 갈아 차가운 카카딸바, 그리고 물 한 바가지의 긴급조치 :-|

여름엔 역시 수박

열심히 물 주고 말걸고

다듬고 한 찬수의 수고를 알았던 걸까

발코니의 화초들은 한창 빛이 고와졌다.

특히 대나무가 자라는 속도는 놀라웠다.

그 풀들 곁에서 한 밤의 생강차도 호록거리고

겁 없이 심야의 해물라면도 즐기고

이런저런 가게에서 태양광 조명들을 사다 달았고,

치보에서 산 유리 등 속에는 암사동 살때부터 가지고 놀았던 팅커벨 인형도 달아 놓았다.

가끔 한 밤에 화장실에 가려고 침실을 나오면

달빛이 거실과 발코니를 은색으로 밝히고 있는 가운데 웃자란 대나무 줄기가 또렷이 보였다.

어느 날 아침 헝클어진 머리 그대로 찾아간 로텐부르크.

세어보니 딱 십년 만의 이 곳. 변한 건 없었다. 때론 변화 없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의 모습이 더 슬프고 무서운 법.

예전엔 찬수가 흰머리 뽑아준다고 하면 머리숱 없어진다고 거절했는데 요새는 일단 뽑고 본다. '나라고 별 수 있나' 하는 심정으로 보이는 족족 모조리 뽑는다. :-|

해가 갈 수록 무섭고 슬픈 감정이 커진다. 시작부터 울며 본 울버린... 이 장면은 너무 슬펐다...

고담 새 시즌, 어느덧 아기같기만 했던 브루스도 까페에서 짐에게 여자친구 상담을 하는 사춘기 소년이 되었다. :'-|

lost in translation의 호텔 창가에 앉아 있던 스칼렛 요한슨이 오버랩 됐던 장면, 두 영화 모두 일본 속의 스칼렛 요한슨, 혹평이 많았다지만 나는 기대만큼 좋았다.

그리고 올들어 가장 더웠던 날 방바닥에 살을 식히며 본 러시아 배경의 영화. 이번 여름 그럭저럭 방바닥에 큰 신세 지며 보내고 있다.

진열장에 괴테 플모가 있어 늘 들여다 보곤 했던 이쁜 가게, 영어가 아닌 독일어로 말도 걸어볼 겸 간단히 주인의 조언을 구해 어린이 괴테집을 샀다.

내가 피아노 치다가 잠깐 화장실이라도 가면 이렇게 앉아서 열심히 친다. '바이오 용사'를.

아직 이 집의 계절을 다 보지 못했지만

해가 길어진 지금, 이 집의 빛과 그림자가 좋다.

골목 끝까지 이어진 나무들이 24시간 라일락 향을 뿜어내는 덕분에 거실이 늘 달콤한 여름 향. 저녁엔 소등과 함께 문을 활짝 열어 그 향을 가득 마신다.

그리고 무엇보다 여름의 꽃, 바닥모드에 최적인 집. :-)

바이오 용사

저 높은 파란 하늘

저 깊은 푸른 바다

우리가 사는 곳

지구나라

아름다워라.


찬수가 하도 치고 불러대서 이젠 내 귀에 벌레 :-|

요새 우리 집 주제가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