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Little things are not so little

지난 겨울 나이테의 기록

 새들이 남쪽으로 떠났다. 산책길에 만난 할머니들이 이 새에 대한 얘기를 해 주셨다.

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진 후, 많은 일본인들이 이 새에게 운(복)을 가져다 달라고 빌었다고 한다. 

인터넷에 찾아보라며 또박또박 일러주신 이 새의 이름은 'Kranich'.

우리는 정말이지 오래오래 그 한적한 산책로에 일렬로 서서 새들이 여러 무리로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.

한동안 낮에도 늦은 저녁에도 이 새들이 늘어진 옷자락처럼 긴 여운의 선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게 보였다.

겨울 추위보다 조금 앞서서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다 떠나고 얼마 지나 추위가 왔다. 사실 추위보다, 긴 밤과 회색의 낮이 왔다.


이 곳 겨울의 해는 낮고, 짧지만 더 노랗게 묻어난다. 오후의 창과 벽,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의 등 위로.


독일의 겨울 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달은 후로, 해가 날때마다 화초를 창가로 옮겨주고 내 의자도 볕 드는 곳으로 옮겨 차를 마시거나 그냥 앉아있곤 했다.


 시각적으로는 오히려 한두 겹의 포근함을 더 입고 있는 겨울의 사진들.


쌀쌀해지면서 실내에 같이 지낼 화초를 키우기 시작했다.

가을에 산 몬스테라, 분갈이 후에 조금씩 자라는가 싶더니, 겨울엔 보기 좋게 갈라진 새 잎을 냈다.


새벽 지하철, 수년 전 언젠가처럼 같은 곳으로 출근하는 이 흔치 않은 순간이 그냥 좋아서 졸린 와중에도 이렇게 바보같이 웃으며 사진을 찍어 두었다. :-|

미팅 끝나고 집으로 오기 전에 찬수에게 꼭 들른다.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 짧은 시간,

어딘가 수줍은 것 같고 어딘가 샌님같은 이 모습이 찬수의 첫 인상이었다.

대학때는 그 모습이 바보같다 생각했는데, 이제는 이렇게 가끔 비치는 그때의 잔상 만으로도 모든 게 다 그리워진다.

한 도막의 표정이나 웃음 만으로 우르르 떠오르는 오래되고 사소하고 희미한 지난 기억들, 

그리고 혼자 돌아오며 생각한다. 언젠가 이 시간들이 또 몹시 그리우리라는 것.


단지 해만 짧은 것이 아니라 겨울은 여러가지로 제약이 많다.

해가 늦어지는 칠흑같은 새벽은 믹서기를 돌리기에 너무 이른 감이 있어서 과일과 함께 갈아마셨던 견과류들을 일일이 씹어 먹어야 하는 것도 그 중 하나.

우리가 '개밥'이라고 부르는 이 한 통의 견과류+베리류를 찬수는 새벽마다 내 랩탑 앞에 이렇게 곱게 담아두고 출근한다. 

이 개밥을 개처럼 깨끗이 비우고 찬수 책상 위에 반납하는 것이 나의 몫.


출장 전 어느 눈 내린 날, 추위에 예민한 찬수의 겨울 미용은 이제 난로 앞에서.

나도 그렇지만 찬수도 숱이 많이 줄었다. 이제 이마 라인은 매직으로 칠해 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. :-|


긴긴 겨울밤 야식과 수다, 가끔 정말 한여름 매미처럼 미친듯이 떠들어대는데 그럴땐 회사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았는지, 너무 단 간식을 먹지는 않았는지 체크한다.

인풋과 아웃풋이 기계처럼 정직한, 예민한 몸뚱이를 가진 찬수 :-| 


함박눈이 두어번 내렸다. 눈 내린 곳은 어디나 스노우볼처럼 아름답고 완벽해 보였다.


단 둘이는 처음 달려본 것 같다. 독일의 눈 내린 겨울 산.


2017년, 앨 고어의 다큐멘터리 2편 (An Inconvenient Sequel:Truth to Power)이 드디어 나왔다.

1편을 본 지 거의 10년 만. 다음 10년이 지난 10년 보다 모든 면에서 나아지기를. 10년 후에는 우리가 50이네 :-|

찬수가 출장 가고 혼자 있을때는 이상하게도 보고 싶어 쟁여두었지만 통 손이 가지 않았던 '노부부'나 나이든 커플이 나오는 영화가 보고싶어 진다. 

혼자 울며 본 영화 'Ruth & Alex (5 flights up)', 좋아서 나중에 찬수랑 한 번 더 봤다.

다이앤 키튼의 주름진 미소를 보고 있으면 쓸쓸하게만 그려졌던 노년의 그림이 보드랍고 따뜻하게 다시 그려지는 기분.


겨우내 난로 앞에 앉아 나눠 먹은 찬수의 따뜻한 음식들.

나와는 달리 요리를 좋아한다. 내가 많이 - 두 그릇, 세 그릇 먹은 후에  개같이 긴 혀로 그릇까지 핥아 먹는 것을 보는 것도. :-|


같은 유럽이라 믿기지 않게 볕 좋았던 겨울의 파리 (뒤에 이렇게 귀여운 아저씨가 찍혔을 줄이야 :-O)

근래 '각오'없이는 갈 수 없는 곳으로 느껴졌던 곳이었다. 

콩코드 광장의 커다란 트리도,  샹젤리제 거리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이젠 없었지만 저녁무렵 들어온 가로등 빛. 그것으로 충분했다.

불 들어온 광장을 가로지르며, 밤에 이 곳으로 놀러 나올때면 이 고전적인 가로등이 너무 좋아 이 가로등에서 저 가로등으로 뛰어다니곤 했던 오래전 그 겨울밤들이 그리워졌다.

5년. 지금 보니 나는 5년 전 그 외투와 그 부츠를 그대로 입고 같은 장소에 같은 사람과 서 있었다.

어쩐지 5년이 단 몇 달처럼 쉬 밀려난 느낌과, 그 순간들이 아주 오랜 시간동안 차근차근 밀려나서 이제는 사라질 듯이 작게, 점처럼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. 

잠은 짧지만 꿈 속의 감정은 늘 장황하고 긴 것처럼, 길고도 짧고, 짧고도 긴 시간들.


정육점 아저씨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

캐롤 들으며 트리 해체

트리 해체 전 기념촬영 :-|

유럽의 긴긴 겨울, 크리스마스가 있어 견뎠다.

이 곳 겨울은 너무 깊어서 보내고 나서 되돌아 보면 어딘가에 나이테가 새겨졌을 것만 같은 느낌.

두려움과 함께 뭔가 경외감마저 느껴지는 이 겨울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'정서적인 준비'를 단단히 해 두어야 한다.

좋아하는 넷플릭스 시리즈들의 포근한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들을 따로 기록해 두고, 겨울 배경의 포근한 영화 파일들도 잘 정리해 두고,

겨울에 난로 앞에서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들도 주문해 놓고 한 권 한 권 천천히 읽어가고 있다, 

이 곳에서라면, 월동 준비를 이렇게 봄에 시작해도 결코 이르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. 왕좌의 게임에서처럼 사뭇 진지하게 :-|


이 집에서 맞은 두 번째 새 해. 

한국에서 이사 다닐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던 느낌이다.

이 집을 내 집이라고 느끼는 것, 내 물건의 내 자리라는 느낌을 마음으로부터 갖게 되는 것에.

집을 나설 때, 이른 해, 오후의 해, 저녁무렵의 해가 집 근처의 하늘과 건물, 나무에 물드는 모습들을 차곡차곡 눈에 담으면서

사람들이 저녁에 짓는 밥 냄새, 이곳에서 자라는 풀과 벌레와 흙이 섞여 풍겨오는 냄새에 익숙해져 가면서

타국에서의 첫 우리동네를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 같다. 암사동의, 백석동의 옛동네와는 또 다른 그림이겠지만.